황무지에 ‘자유의 십자가’ 세운 순교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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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기독교와 대한민국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위대한 생애 이승만의 치적을 논할 때 기독교를 빼놓고선 제대로 평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적 행적을 부수적으로 끼워 넣는 수준이 아니라, 생애전체를 기독교 개신교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여 분석해야만 거대한 삶의 참모습과 깊은 듯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건국 후의 이승만 통치를 ‘독재’로 낙인찍는 것은 정치적 반대세력의 일방적 주장이거나 3.15부정선거와 4.19를 빙자한 역사의 매장행위일 뿐, 학계마저도 좌파 프레임에 갇혀버린 나머지 정작 당시의 이승만의 정치 실상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쪽에서도 “독재는 했지만 공이 더 크다”는 식으로 예단하고, 이승만의 현대사에 대한 접근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겉만 보고 속은 안보는, 또는 피하려는’ 기회주의로 비친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기록의 왕’답게 책들과 논설, 연설, 성명서, 기자회견 등등 수많은 문서자료들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지금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데도 이를 방치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처럼 모든 정치행위에서 솔직하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 주창한 정치인은 없었다.
물론 소통의 격차나 견해 충돌 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이승만 만큼 언행일치 초지일관 목표관철을 달성한 정치 지도자는 한국 현대사에선 찾아내기 어렵다.
가장 좋은 본보기는 4.19때 ‘국민이 원하면 하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자진사퇴한 역사이다.
80세 노대통령의 결단, 그것은 이승만에게는 ‘특별한 결단’도 아니다. 파란만장한 평생을 관통한 자유헌정의 정치철학과 개신교적 신념이 명하는 그대로,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도자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 자진사퇴의 선택은 그가 평생 독재자가 아니었음을 웅변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여기에 바로 이승만 고유의 ‘위대한 영혼’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발견...성령...루터, 웨슬레와의 만남
이승만의 정치사상은 배재학당에서 ‘이상 국가’ 미국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파고들었을 때 형성되기 시작한 ‘자유 민주 공화주의’이다.
“나는 배재학당에서 영어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이다. 한국의 대중이 무자비한 정치 탄압 속에 살고 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기독교국가에서는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어떠한 혁명이 일어났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이 나라 정치 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목숨을 바치겠다.”
이렇게 내면 혁명을 일으킨 청년, 20살까지 동양학문을 마스터한 성리학의 선비는 그때 글자 그대로 ‘돌아버렸다’고 할 만하다.
‘정신혁명 당한’ 청년은 즉시 자유천국 미국의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였고,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 전제주의 막장에서 백성폭압의 권력 도그마로 전락한 성리학의 노예국가를 어떻게든 일깨워서 자유민주화 하려고 일간신문 창간, 만민공동회, 거리시위 농성 등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반역자로 잡혀 투옥된다.
운명의 한성감옥 사형수, 생명을 포기한 극한상황에서 저절로 기도가 터지고 급격한 ‘성령의 불’을 체험한다. 이승만은 ”그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바로 이것이다. 즉, 24세 젊은이의 모든 가치관과 함께 미국식 헌법국가로 정치변혁을 이루려는 혁명적 열정 에너지가 벼락 맞은 듯 성령의 용광로에 빠져 기독교의 용암과 융합되어버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분리 해체할 수 없는’ 한 덩어리 불덩이로 이승만의 영육에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도 선교사들이 ‘침략의 앞잡이’로 비쳐 회의적으로 보던 이승만은 기독교의 경이로운 세례를 받자 그때까지 지녔던 자유민주주의가 기독교 정신, 아니 개신교 정신과 결합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승만 특유의 성격대로 감옥에서 밤낮 몰입한 기독교 공부를 통하여 그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우남만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이다.
“루터는 결국 개신교를 온전히 세워 사람마다 자유롭게 성경을 공부하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200년간 루터의 개신교가 정치제도를 개혁하기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미국 둥 각국의 정치적 대혁명이 일어났고 오늘날 구미각국의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인간 행복이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를 근대문명의 시조라 칭함이 과연 합당하며, 루터 선생의 능력은 곧 예수의 진리에서 온 것이다.” (이승만, 신학월보)
즉, 자신이 배운 미국의 정치적 자유란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결과란 역사적 사실을 깨달은 것. 개신교의 자유정신이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기독교 자유국가를 만들어내고 구미각국의 자유평등사회를 이루는 출발이 되었고, 이것은 곧 예수의 진리가 자유민주공화주의의 뿌리였음을 영혼 깊이 각인한 것이었다. 그 바탕 위에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현실개조 역정을 연구하고 그 순례 길을 따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의 순례길에 나섰던 이승만이다.
“예수를 따라 목숨을 버리겠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옥중 6년간 수백편의 논설을 몰래 써서 자신이 창간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 등에 게재, ‘예수교가 대한의 장래 기초’, ‘그리스도의 나라 만들기’, ‘백성의 교화’등 개신교를 통한 국가개혁과 국민 교육의 시급성을 줄기차게 계몽하고 있다.
감옥생활 막바지 러일전쟁 발발에 급히 저술한 [독립정신]엔 영국-프랑스-미국의 혁명사를 논하면서 미국 정치제도를 집중 해설하고 예수교를 근본 삼아 자유민주 공화국을 세우자는 각오를 여러 번 다짐한다.
“연약한 애국동포들을 대신하여 흉악한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어야한다. 그런 죽음만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강렬한 신심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한다면 이를 믿고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다른 길은 없고 다만 예수의 뒤를 따라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뿐이다. 천하에 의롭고 사랑하고 어진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승만, [독립정신])
이처럼 기독교 정치사상가로 거듭난 이승만은 순교자적 경지까지 다다른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예수를 따라 목숨 버릴 각오로 일한다’는 것은 개신교의 봉사정신, 순교자 정신이다. ‘순교자 신앙’은 ‘십자가 신앙’이라고도 한다.
옥중의 이승만의 경우, 예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까지 해야 할 일이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자유민주공화국으로 혁명하는 독립운동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고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한다면, 이 교(예수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고, 신학문을 힘쓰더라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며, 외교에 힘쓰더라도 다른 나라들과 깊은 정의를 맺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국권을 중하게 여기더라도 남들과 참으로 동등한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자유 권리를 중히 하려해도 균등한 자유 권리의 방한(防閑:한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교(敎)로써 만사의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어야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영국-미국과 동등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 (이승만, [독립정신])
‘미국과 동등한 나라가 되자’는 말은 이 글을 쓸 때 이미 “미국과 손잡자”고 결심하였다는 결의의 표현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러일전쟁이 한창 벌어진 순간, 한반도 쟁탈전을 벌이는 러시아와 일본, 중국을 견제하여 대한을 지켜줄 나라는 기독교 최강국 미국 밖에 없음을 인식하고미국과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기독교 정신으로 개화되어 미국과 친교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국은 왕정 때문에 제외시켰다고 한다.
누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남다른 전략가 이승만의 두뇌는 이때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의 그림을 그린다.
미국을 알아야 미국과 친할 수 있고 미국과 친해야 미국을 활용할 수 있는 법, 이승만은 배재학당이후 감옥에서도 미국 공부에 매달렸지만 턱도 없다. 미국 현지에 가서 미국 지도층과 친해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대학 등 미국 엘리트 대학에 유학하였고 “5년 내 박사학위” 목표를 굶어가며 이루어낸다. 학업 중에도 학교는 물론, 교회, 집회 강연 등 독립운동 겸 미국 지도층 친구 만들기에 동분서주한다. 그러던 와중에 미국인 가정에 맡긴 7대 독자 아들을 전염병에 잃기까지 하였다.
박사학위 논문 역시 국제관계와 [미국의 힘을 이용한 중립 유지]에 초점을 두고 미국의 영향력이 미친 역사적 사례를 분석 연구하였고, 기대 하였던 긍정적 결과가 나오자 “미국 만세”라고 결론에 써놓았다. 한국 독립의 필수조건 한미동맹에 믿음을 갖게 된 기쁨의 만세로 보여진다. 그는 감옥에서부터 공부한 국제법 관계연구가 결실하여 박사가 되고 미국에서도 드물던 국제법 연구논문은 대학에서 출판된다.
이렇게 하여 지미-친미-용미의 ‘준비된 국제 전략가’ 이승만은 마침내 미국을 이용하여 유엔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을 이루어내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6.25 공산침략을 막아낸다.
휴전 결사반대-단독북진통일의 염원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미국이 죽이겠다며 반대한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동맹을 목숨 걸고 얻어낸 일(1953년)은 이승만의 독립정신, 개신교 자유정신과 순교자 신앙이 거둔 ‘하나님의 승리’였다.
같은 시기, 해마다 한가지 씩 성취해낸 자유민주 공화국의 필수조건, 부산정치파동의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강행통과(1952년), 이어서 사사오입파동(1954년)을 통해 확립한 자유시장경제 헌법, 그리고 동시에 이들 대한민국의 자유 정치-경제의 두 기둥을 튼튼히 지켜주는 한미동맹이란 방호벽을 구축하여, “이 조약으로 우리후손 대대로 번영의 복락을 누릴 것”이라던 이승만 담화는 ‘민주화된 세계10대 경제대국’ 신화로 30년 만에 증명되었다.
이들 세 가지 사건은 “내 평생의 마지막 소원을 이룬 무혈혁명”이라고 스스로 평가한 이승만의 말 그대로, 불굴의 순교자적 신앙이 목숨 걸고 혼자 완성해낸 위대한 ‘자유혁명’이다.
특히 이것은 정치권과 미국과 언론이 독재자로 규탄하고 미국이 ‘제거하겠다’며 죽이려던 협박에 맞서서 “누가 뭐라고 욕해도 좋다. 죽일 테면 죽여라” 정면 대결하여 얻어낸 승리였다.
국제적인 반대와 국내의 고난을 뚫고 50년 전 맹세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끝내 실천해내고야 만 이승만의 신념, 앞서 말한 자유민주공화주의와 뭉쳐진 개신교 신앙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500년 사대주의와 권력쟁탈의 도그마로 전락한 성리학의 노예사회는 이렇게 해서 완벽하게 해방되었다. ‘백성의 결박을 풀어야 독립 된다’며 한국판 노예해방을 부르짖던 20대 아니 이승만의 자유정신은 불완전하던 대한민국 독립 장치를 완벽하게 보완하였다.
한국인이 영원히 져야 할 ‘자유의 십자가’
이승만 기독교사상의 남다른 특징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도로써 건국 국회를 개원하고 대통령 취임연설도 하나님 은혜로 시작한 건국자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키우고 지켜주는 어린 양의 목자, 개신교가 말하는 바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봉사자’가 되어야 하고,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 역량을 길러주고 인도하는 선지자, 봉사자, 최후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국 후 각종 봉사자와 봉사시설을 확대해 나갔다. 학교에 교목(학교목사), 군대에 군목, 형무소에 형목을 배치하고, 기독교방송, 신문잡지 등을 설립 확장하며 미국 유학에 집중하였다. 임정대통령 취임이후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한미친우회 네트워크 2만여 명은 이때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나라’를 세운 이승만을 다방면으로 도와주었다.
공산침략이 초토화시킨 황무지에 세운 ‘자유의 십자가’- 그렇다. 그것은 평생의 십자가였다.
40여년 독립운동에서, 임시정부 공산세력과의 싸움에서, 해방 후 건국투쟁에서 6.25전쟁에서 국내외 자유의 적들과 싸우고 또 싸워 이겨낸 순교자 신앙의 승리, 그 마지막 ‘순교’가 다름 아닌 ‘4.19 자진하야’이다. 자신의 집권당이 저지른 부정선거 실상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을 지켜야하고 자유민주공화주의 헌법을 살려야 한다...이승만은 즉각 사퇴성명을 발표하였다. “걸어서 가겠노라” 80세 순교자의 마지막 순례길,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목에 걸었던 형틀이래로 평생 걸머졌던 십자가를 지고 떠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예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리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 건국 10여년 대한민국 정치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오랜 구국(救國)의 고행 길에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나를 위로하지 마시오. 나는 위로받을 일이 없소. 똑똑한 국민을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오.” 이화장에 날아온 대만 장개석의 위로편지에 이승만은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이승만 정신이 왜곡되고 생매장되어 자유의 황무지로 변해가는 오늘의 대한민국, 특히 개신교 자유인들은 모두 나와서 짓밟힌 자유의 십자가를 둘러메고 자유의 적들을 무찔러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세운 자유의 십자가는 자유통일 그 훗날까지, 아니 대한민국의 영원한 생명을 지키려면 우리 모두가 져야할 ‘영원의 십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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