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울음과 선지자 의식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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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보다 먼저 반공이 있었다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건국혁명의 지도자 이승만은 신념의 정치가였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을 혁명이라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한 사상최강의 연합국인 미국과 소련의 정치노선과 정책의지에 이승만 리더십은 항거, 이를 좌절시킴으로써 건국작업은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주로 미국무성에 드나들며, 임시정부의 승인을 줄곳 요청했다. 미국이 거부의 주된 이유로, 이승만이 문제의 한길수 등 좌익세력과의 합작을 거부하는 등으로 한국인들이 단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들었다. 흔히있는 강대국의 약소민족 하시발언이다. 그리고 국무성 관료들이 공산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용공발언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을 때부터 반공산주의였다. 소련의 참전을 얻어야 일본을 항복시킬것이라 계산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소정책의 결과로, 일본이 패전하면 소련의 한반도 장악을 미국정부가 용인할 것이란 관측이 미국의 조야에 돌고 있기도 했다.
이승만은 대놓고 국무성 관리들에게 저항했다.
공산 소련과 협력하며 세계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을 향해, 그 미국과 소련의 미구의 상충을 내다보는 이승만의 주장이 국무성관료들에게 먹힐 리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투쟁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것」과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길」은 언제나 하나였다.
미래를 향해 이렇다 할 보장이 없는 이승만한테 세계전쟁을 주도하는 대미국을 대표하는 국무성과의 「기나긴 불화와 공개적인 갈등의 시간」은 외롭고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승만은 「불굴의 인격적 강인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시라큐스 대학등의 언론학과교수로서 이승만을 위해 정치자문과 홍보역(1945-1959)을 맡아주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증언하고 있다. (로버트 올리버 저, 한준석 역,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이런 중에도 이승만은 2차대전 말기 영국이 나치스로부터 탈환했던 그리스의 내전 (1944.12.3-1945.1.15) 의 정세평가를 하고 있다. 내전을 일으킨 공산당의 배후에 소련이 있는 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제국주의 잔습의 영국하고만 정책갈등을 하고 있는 미국무성의 오류를 이승만은 지적해 보이기도 했다. (이정식,「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이승만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냉전개시점으로 보는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는 1947년 3월이었다. 그리스 터키를 위시하여 어디든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는데는 미국이 지원하겠다 한 것이다.
앞에서 그리스 관련 정세평가를 보았지만 이승만의 선지자적 통찰력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서 이미 2차대전이 시작되어(1939) 있었지만 미국의 여론은 고립주의에서 벗어나기 싫어했다. 이승만은 이 미국 앞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넉달 전인 1941년 8월 1일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란 저서를 내어, 세계정복 야욕을 갖는 일본의 응징에 대한 미국인들의 각오를 촉구하면서, 전쟁의 임박을 예고하고 있다. 이 해 12월 7일 진주만 기습이 있게 되자, 식자들이 이 책을 많이 읽고 이승만을 ‘예언자’라 했다 한다.(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이 예언자를 ‘미리 알았다’는 뜻의 예언자(豫言者)로 아는 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책 제일장의 제목은 「일본의 황도와 전쟁심리」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세계정복야욕의 본산이자 원천인 천황제가 그 본질이 우상숭배 시스템임을 파헤쳐 놓고 있다. 미국 같은 일신교의 세계에서는 침략의 주체가 우상숭배집단임을 폭로하는 것 만으로 전사회에 응징의 윤리적 파토스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승만은 알고도 남는 개신교(감리교)신자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예언자(豫言者)아니라 예언자(預言者)라 해야 맞다.
구약의 예언자(預言者)들이 이스라엘의 권력자와 다중에게, 초월자의 대언자(代言者)로서 목숨을 걸고 외쳤던 두가지 주제는 우상숭배의 타파와 윤리적 각성이다.
그 유명한 독일의 학자 막스 베버는 고대 이스라엘 이래의 예언자(預言者)의 연면한 전통이, 서양사의 합리주의의 추동체가 되어 고비마다 개혁의 물고를 터 오늘의 성사에 이르렀다 하고 있다. 예언자(預言者)의 존재가 역사전진의 다이나미즘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지상최대의 권력자인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와 소련 공산주의한테 말려드는 현상을 두고서 미국의 세계전략을 향해 예언자(預言者)의 소리를 쏟아내려 했던게 그의 정치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나 한다.
전쟁이 끝나 이승만이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45년 10월16일이었다. 국무성의 도움이 아니라, 남한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 장군의 귀빈자격이었다.
그가 돌아온 해방공간에서 부딪힌 현실은 친공산주의 정서가 남한 땅에 더 우세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본 올리버의 이승만 이해는 사도(使徒)급이라 할만하다. 올리버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박사의 뇌리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반(反)공산주의 정서는 미국정부의 (필자주:용공적) 연립정책과 직접적으로 충돌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친공산주의 정서와도 정반대였다는 사실이다. 이박사는 귀국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남한에 널리 퍼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의 대미 투쟁』)
공산주의 문제로 미국정부와도 충돌했던 이승만이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그가 발견했던 해방정국의 좌경적 용공성 속에, 그의 할 일은 있었던 것이다.
반공의 실천으로 그의 건국작업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미국, 소련 세력의 어설픈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 발을 디딘 이승만은 냉정개시 전야의 세계정서를 다음과 같이 맵게 진단하고 있었다.
『전쟁을 지도했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시작해 놓은 여러가지 잘못된 정책 (필자주:주로 대소관계)과 그런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을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는 트루먼 대통령으로 인해 한국만이 아니라 자유진영 전체가 무의미하게 피해를 보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정했지만, 반대하는 이승만에게 오히려 건국을 위한 정치조직과 전국적 반공캠페인의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신탁통치란 그 본질이 보호국적 성격이기도 했지만, 소련이 관여하는 탁치란 이승만의 고려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 군정당국이 추진하려 든 좌우합작 같은 것, 이승만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46년 6월 단계에서 남한만의 과도정부를 수립하자는 이른바 단정노선을 선창하게 된다. 5월의 미소공동위의 결렬이 계기였지만, 46년 6월단계에서 미소냉전의 불가피성을 세계정세에서 읽은 결단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영국수상 처칠이 「공산세력에 의해 발트해로부터 아드리아해 까지 대륙을 횡단하는 ‘철의 장막’이 내려졌다」라고 경고 연설한 것은 46년 3월이었다.
히틀러가 물러간 동유럽국가에 소련이 통제하는 공산정권이 종전 몇 개월 사이에 국가를 완전 장악해 가는 것을 이승만은 놓치지 않았다.
소련의 적화야욕은 이미 평양에 와 있었다. 절대권력을 가졌으되 공산주의와의 타협 불가능성을 알지 못하는 미국당국에 건국의 방향타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 아닌가.
무엇보다도 먼저 미군정의 정치노선에의 도전일수밖에 없는 ‘단정노선’ 천명은 이승만 정치인생의 ‘좁은 문’이었다. ‘단정노선’을 두고 이승만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겠다는 학자들 까지가 ‘불가피했던 차선의 선택’이라 하고 있다. 좌익의 정치 선전을 의식에서 지우지 못하는, 역사를 움직이는 파워폴리틱스에 무지한 샌님적 탁상공론이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위해 가능한 단 하나의 방식을 우파 학자들까지도 ‘차선’운운으로 자신없어 하니까. 이승만은 역사 속에서도 외로운 것이다. 자기 철학에 투철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중립으로 주저 앉는 것을 학자의 본분으로 아는 한국 우파 지식인들의 이류성 때문에 오늘도 사상의 혼미는 거둬지지 않고 있고, 그래서 건국절도 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47년 3월의 트루만 닥트린 발표는 트루만이 드디어 공산주의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승만의 외로웠던 반공, 반소 정치노선에 덩치큰 미국이 접근해 간 것이다. 미국의 손으로 신탁통치안 같은 것 거둬들이고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키로 한 것이다.
소련에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다. 이승만의 반공, 자유민주 이념의 건국작업 앞에 문이 열리게 된것이다.
한성감옥과 알키메데스의 점
이승만은 불퇴전의 신념의 실천이 때로 현실의 정치이익을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이승만의 완고함과 옹고집은 걱정거리였다.
이는 국내의 정적들, 미국의 당국자, 국내의 언론들이 이승만에 던지는 주된 공격 거리가 되었다.
이승만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본 올리버 교수는, 그의 신념의 강인성과 불변성을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확신은 그의 평생을 지탱해 준 강철의 보루였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지난 날 낡은 왕정의 반동주의에 처음 저항을 시작한 이래 50년동안 겪어온 여러 번의 시련과 좌절 앞에서 그는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기약없는 기나긴 역경의 터널을 통과 하면서 강철 같은 확신을 견지해 내는 것은 평균적인 인간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같은 비범한 속성이 이승만의 인격에 결합되는 계기는 어디쯤일까를 더듬어 보는 것이 이글의 처음부터 뜻하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고 했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는 자전적 체험수기 『죽음의 수용소』 (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에서 니체의 이 말을 받아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깨닫는 것 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이승만을 연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한말 한성감옥에서의 5년여간의 영어생활에서, 그의 사상과 인간 그 자체에 혁명적 변화와 성숙이 있었고, 그를 딛고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로서의 위대성을 체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김낙환 『우남 이승만의 신앙 연구』).
이승만이 한성감옥 초기의 혹독했던 고문과정에서 격게되는 회심(回心)현상의 결과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개종전의 그의 정신풍경을 더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아마츄어 불자 정도로 그리는데, 그는 이미 과거용 수학을 끝낸 탄탄한 유학자의 교양 위에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감옥생활 중기에는 월남 이상재,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 등 조선의 인테리들이 다수 입소하여, 이승만의 교화로 개종도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승만은 그가 개설했던 감옥학당에서 이들과 열띤 토론을 벌리는 나날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종했으되 강렬한 조선인 아이덴티티(정체성)의 소유자인 이승만의 기독성(크리스챠니티)은 월남 이상재 등의 제일급의 주자학적 교양과 열나게 부딪혔을 것이다. 이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에 한성감옥은 이승만 앞에 동서(東西) 이질적인 두 문명의 조우점을 현출해 놓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세기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마지않는 '알키메데스의 점'으로서, 창조적 소수자(토인비)에 속하는 지성이 이 점 위에 섰을 때, 신문명이나 혁명적 사상이나 새로운 윤리적 파토스는 창조되어 나온다 하고 있다.
그 동안 이승만 연구가 많지만, 이승만을 동양근대사에 드물게 알키메데스의 점위에 섰던 사상사의 거인으로 그리는데는 모자람이 있어 보인다. 일본근대사에도 유례를 찾기는 힘든다.
꼽아보려면 퇴계학자로서 메이지(明治)정부의 각료였던 요꼬이 쇼난(橫井小楠)과 일본근대화의 국민교사라 일컬어지고 우리 개화파의 선망의 적이기도 했던 후꾸자와 유키치(福沢諭吉)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꼬이(橫井)는 서양의 진수에 부딪혀 볼 겨를도 없이 암살되었고, 후꾸자와(福沢)는 동양 내지 일본적 아이덴티티의 파탄 위에 서는 서양문명의 향수자였을 뿐이다. 일본문명 위에 창조적 주체성의 계기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후쿠자와에 교도된 일본근대화가 갈 곳은 군국주의 뿐이었던 것이다.
연구자 중에는 감옥에서의 이승만의 사상적 변모의 귀착점이 탈아입구(脱亞入欧)였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탈아입구는 말할 것도 없이 후꾸자와(福沢)에 연원하는 용어이다. 이승만은 기독교에 입신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초월자로부터의 강렬한 소명의식을 갖고 나서도, 수십년의 미국생활 속에서도 그는 조선인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은 다 아는 일 아닌가. 그는 후쿠자와의 아류 같은 사상가는 절대 아니었다.
이승만의 울음
신흥우(申興雨)는 이승만의 한동네 친구였고, 배재학당의 한해 후배로서, 한성감옥에서 학당이 개설되었을 때는, 그와 함께 죄수들의 교사였다.
한국최초의 감리교선교사로서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창설했던 헨리 G.아펜젤러가 해난사고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이승만의 충격과 슬픔은 컸다.
신층우는 기회있을 때마다 이때의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이승만은 은사의 비보를 듣자 하루 반을 내리울고 단식했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朝鮮日報』1934.11.27. 「조선 신교육측면사- 培材50년 좌담회」, 김낙환의 『우남 이승만 신앙연구』에서 인용)
이승만이 감옥에서 아펜젤러의 부보를 들었을 때 울었다는 그 예사롭지 않은 울음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아펜젤러의 죽음 관련 일지를 간추려 보고, 이에다 이승만의 울음 전후 감옥 내 활동일지를 맞대어 본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 목포로 가던 중 해상조난, 사망(충남 어청도 근해)
6월 13일 아침, 인천의 기선회사서 선교협회에 아펜젤러 조난통보.
6월 14일 황성신문, 어청도 해난사고만 보도
6월 16일 황성신문, 아펜젤러 등 18명 승객 조난 사망 보도
6월 16일 정동교회서 아펜젤러 추도예배.
6월 24일 오후2시 배재학당서 교사, 학생, 우인들 추도회
6월 24일 오후4시 각국공사, 국내선교사, 국내외 귀빈들 참석 추도회.
(이상, ①이진호, 『아펜젤러와 조성규의 조난사건』, 도서출판 우물, ②김낙환, 『아펜젤러 행전』, 청미디어 참고)
교통, 통신이 불편했던 당시, 13일 아침에사 인천의 기선회사로부터 조난 통보가 있자, 배재학당에서 감옥에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이승만의 뒷바라지(주로 신앙지도, 서책반입)를 하던 벙커 목사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승만에게 부보를 알렸을 것이다. 여하튼 이승만의 하루반의 울음은 6월 13일 오후에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울음의 시점을 짚어놓고 이승만의 감옥에서의 활동상을 알게 하는 서역(書役) 일지를 대조해 본다.
이승만의 옥중 서역 일지
1900년 봄 : 『체역집』 베낌 시작
1900년(음) 4월4일~7월6일: 『청일젼긔』한글번역
1901년2월8일~1903년4월17일: 『뎨국신문』에 논설집필
1902년4월9일: 『주복문답』 한글번역
English Grammar Material Primer 번역
1902년6월18일 이전: 『산술』순한문 저
『적주채벽』 편
The Junior Methodist History 번역.
1903년4월20일~1904년2월19일: 「신영한사전」편찬작업
1903년5월: 『신학월보』에 「옥중전도」게재
1904년2월19일~1904년6월29일: 『독립정신』집필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p.78에서)
위의 일지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1902년6월18일을 경계점으로 다음해 4월 하순까지 서역작업은 휴지기에 들게 되는데, 이승만의 옥내활동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게 한다는 것, 또 하나는 그동안 옥내에서도 왕성했던 이승만의 저술•번역 등의 서역이 휴지기간에 들어가는 6월18일에 마지막으로 마무리 된 서역이 The Junior Methodist History(감리교약사)의 번역이었다는 것 등이다.
서역작업의 휴지기간에 이승만은 감옥 서장에게 진정서를 내어 받아들여지고, 서장 등의 지원으로 옥중학당을 개설하여, 죄수 학생들 상대로 교사 역을 맡는다. 가르치는 내용은 영어, 일어, 지리, 문법, 산술, 동국역사, 명심보감 등등 거기다가 성경공부, 기도하기, 찬미가 부르기 등이었다. 신학문과 종교교육을 함께 했으니, 이승만은 한성감옥 내에 그가 다닌 배재학당의 축소판을 만들어 보려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때에 옥중학당에서 이승만을 도운 신흥우가 이승만의 긴 울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펜젤러의 부음을 접한 이승만의 긴 울음 다음에 그는 그 동안의 서역작업은 마무리해 버리고 옥중학당 개설을 결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펜젤러가 해난사고를 당했던 6월11일에서 휴지기로 들어갔던 6월18일까지의 기간에, 일지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The Junior Methodist History를 이승만은 번역하고 있었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즉 아펜젤러가 건넸을 The Junior Methodist History를 아펜젤러의 부음을 듣는 순간 이승만은 번역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승만이 번역하고 있던 책은 어떤 책이었던가를 알아보고, 그의 긴 울음의 정신분석적 의미를 촌탁해 본다면, 아펜젤러의 죽음과 이승만의 긴 울음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엮어진 장엄한 섭리적 드라마는 모양을 드러낼 것이다.
The Junior Methodist History를 이승만 독서목록으로 기록한 곳에는 책이름 옆의 괄호 속에 studied and translation이라 해놓았다. 특별히 공부하고 번역한 책임을 강조해 놓은 것이다. 이화장 문서에는 원본이나 번역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미국의 헌책방에서 입수된 책의 제목은 Junior History of Methodism, 부제가 「엡워스 연맹의 청소년 공부속회용」이고 발행처는 미국 감리교 서책협회, 초판이 1900년, 재판이 1901년, 입수된 것은 1925년판, 전부가 103페이지의 책이고 사진이 약 5분의 1 쯤이다. 이책의 초판이나 재판쯤을 감옥에서 서책을 넣어주던 아펜젤러 선교사가 촉망해 마지않던 제자 이승만에게 건냈을 것 같다.
이 책은 도입부에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메소디즘 운동을 시작하던 직전시대의 영국의 사회상을 그려놓고 있다. 영국종교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대였다 하는 이때의 사회는
온갖 종류의 범죄와 무질서로 ‘주일날은 악마의 장날’이라고 할 정도였다. 「교회는 나태하고 무력했으며, 교직자는 타락하고 속물적이었다.」
이 책은 메소디즘이 태어날 때의 사회상은 이와 같았는데, 메소디즘이 태어나 스스로의 요람인 영국사회를 변혁시켰다 하고 있다. 때는 영국의 산업혁명 전야였다.
조선을 깊이 사랑하고 꿈많은 개혁가였던 이승만은 책 첫머리에서부터 세상을 바꿔놓은 메소디즘 운동에 끌려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또한 메소디즘의 창시자 웨슬리가 되풀이 된 시련과 신앙적 고뇌를 거쳐 회심에 이르는 과정이 적당히가 아니고,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1738년 5월24일 저녁 런던거리의 모라비아 교도들 집회에 가서, 말틴 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을 듣고 있다가, 웨슬리는 회심체험을 한다. 「나는 내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 짐을 느꼈다. … 그리고 그가 나를 죄와 죽음의 법칙으로부터 구해 냈다는 것을」이승만은 감옥에서의 회심체험을 뒷날 비망록에서 「이상스럽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은 번역을 하다가 스스로의 회심체험이 웨슬리의 그것에 닮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 신앙적 자기정의에 혁명적 비상 혹은 고차원의 소명의식(sense of deep calling)에 눈떴을 것 같기도 하다. 이승만의 긴 울음은 제2회심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메소디즘 운동의 출발에 큰 영향을 준 모라비아 교도들의 원조 존 후스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루터보다 100년이나 앞서 교황의 비리와 압제에 항거하다가, 교황청에 의해 정죄되고 화형당했다. 이런 구절이 보인다.
『콘스탄스에서 후스를 태운 불길의 불꽃은 바다 건너 런던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고, 드디어는 온세계를 둘러싸고 뻗어가는 메소디즘의 불꽃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은사 아펜젤러의 사랑과 믿음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국가 개조의식의 열정을 간직한 27살의 청년 이승만의 가슴에 이 책속의 불이 어떻게 옮겨 붙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승만의 울음과 소명의식
프로이트는 사람이 죽었을 때의 관계자의 울음을 「복상(服喪)작업」, 혹은 「비애의 작업」이라 하여 분석을 가하고 있다. 「이 울음 속에 있는 인간은 그 전(全) 에네르기가 고통과 회상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해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인간의 에고(ego)는 상실된 대상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의 결정에 다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래놓고서는 인간을 욕구에의 반응체로만 보는 프로이드는, 「자기애적 만족을 바라는 에고(ego)가 드디어는 정신내부에서, 사망한 대상과의 유대를 단절할 것을 결심한다」고 했다. 앞에서 본 실존적 정신분석의 빅터 프랭클 같으면 울음 분석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프로이트의 결론에 반대할 것이다. 보통은 그런 경우가 많지만, 그와는 달리 의미를 찾아내어 삶의 동력으로 하는 인간 부류는, 망자(亡者)가 추구했던 의미를 자기의 추구목표로 승계함으로써, 망자와의 유대, 혹은 자기동일시를 영원으로 가져가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청년 이승만은 강렬한 복상행위인 긴 울음을 통해 초월자로부터 소명된 아펜젤러의 한국사역을 자기의 사역으로 받아들이고, 초월자로부터 웨슬리, 아펜젤러로 이어지는 영원의 행렬에 스스로 나아가려 했을 것만 같다.
아펜젤러가 1885년 4월5일, 인천에 상륙하고서의 첫 기도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부활절 날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겨레를 얽어매고있는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44살에 삶을 마감한 아펜젤러는 첫날의 이 기도에서 보인 소망과 간구를 이 땅에 실현하는 단서를 연 선교사였다. 한말의 「은둔, 억압, 정신적 암흑, 무지와 질병의 낯선 땅」에서 영혼을 구하고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겠다는 대담한 비젼과 열정으로 조선에 헌신했던 선교사였다. 그와 같이 일했던 동료선교사, 전기작가들이 그같이 말한다. 그가 학당장이었던 배재학당이 한국민중•의식분자들의 진정한 근대화 운동이라 할 독립협회•만국공동회의 산실이자 베이스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기도 한다.
이승만은 아펜젤러의 죽음 앞에 길게 울고서, 그 다음 시간에 옥중에 학교를 개설했다. 은사 아펜젤러의 사역을 스스로 떠맡겠다는 결의가 울음 속에서 있지 않았을까. 초월자의 사역은 한국사도(Apostle to Korea 미국 교계라 이같이 말한다.) 아펜젤러로부터 청년 이승만에게로 바톤 터치하는 섭리가 이 때에 있지 않았을까.
이 때 이후 이승만은 평생 선지자 의식을 견지한 것이 아닐까.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그랬듯이, 하늘의 대언자(代言者) 의식이 이승만의 「강철 같은 확신」을 떠받쳤던 것은 아닐까.
[출처] 뉴데일리 http://www.newdaily.co.kr/mobile/mnewdaily/article.php?contid=201408140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