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위대한 아버지를 버렸다 [김길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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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자 /칼럼니스트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은 아버지를 버렸다.
낳아주고 키워주고 외적으로부터 지켜서 잘 살게 해준 아버지를 50년이나 버려둔 채 잊어 버렸다. 버려진 아버지는 남의 땅을 떠돌다가 적(敵)들이 덮어씌운 더러운 저주의 거적 속에서 죽어갔다. 오늘은 어느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인가.
한민족을 다시는 외세의 노예로 만들지 않겠다며 자유민주 독립국가를 세운 아버지, 이 나라를 멸망에서 지키려고 국제공산주의와 싸우고 싸웠던 아버지, 그 적들이 붙인 이름 ‘독재자’ ‘친일정권’이란 오명을 오늘날까지도 적들과 함께 지껄이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국민들인가. 올해는 국치 100년, 해방 65년, 건국 62년, 6.25남침 60년, 4.19 학생운동 50년이다.
▲ 1945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있다.
‘나라 찾기, 나라 세우기’에 몸 바친 아버지, 그 나라 대한민국이 아버지를 찾지도 않고 모시지도 않고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는다. 서럽고 외로운 아버지, 그 분은 그러나 슬퍼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으시리라.
당신이 세운 나라가 이토록 번영하는 강국으로 자라난 것이 기쁘고 기뻐서, 사랑하는 국민들의 피땀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서, 이 순간도 아버지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날아다니며 자애 넘친 미소로 우리를 쓰다듬고 계실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아버지가 젊은 시절 꿈꾸던 바로 그 자유국가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왕비를 살해하고 나니 러시아가 국왕을 인질로 잡는구나.”
20세때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등 강대국들의 한국 쟁탈전을 겪으며 왕정개혁,국민계몽운동을 벌인 이승만. 국모살해 복수 쿠데타도 실패하고 입헌군주제를 부르짖다 투옥된 이승만, 7년의 감옥생활중 러-일전쟁이 터지자 <독립정신>을 저술한다. 이승만이 이 책에 그린 나라와 백성의 조건들은 글로벌 현대 선진국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승만을 논하려는 자, 모름지기 이 책부터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독립정신>의 국가정신이야말로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 할 것이다.
일본의 보호국 신세가 되자 다급해진 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갔던 이승만은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프린스턴대 박사가 되었고, 한국 국적을 한사코 고집하며 쓰라린 신고를 이겨낸 35년의 망명투쟁 끝에 조국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이것은 광복이 아니라 또 하나의 비극, 강대국들의 영토 나눠먹기 노름판이었다.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건립, 미국의 좌우합작 협박, 국내의 타협세력들을 달래고 가르치며 고군분투한 이승만의 나라세우기 작업은 전세계와 맞선 1인 혈투였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갓 벗어난 조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바쳐야 할 것인가. 20세부터 70세까지 신앙으로 굳어진 ‘자유민주’ 정신과 더불어 국제정치를 꿰뚫는 예지력, 외교와 영어의 달인 이승만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태어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일찍이 예견했지만 그러나 너무나 빨리 신생 대한민국은 맨손으로 공산세력의 침략을 받았다. 사상자와 규모에서 세계 7대전쟁의 하나인 6.25. 이때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미국과 유엔의 참전을 신속하게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쯤 우리는 김정일 치하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을 3대1로 대적하여 승리한 호국(護國)의전략가, 전세계 3분의 1이 붉게 물들 때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낸 이승만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영웅이다.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손자병법이 아니라도 이승만의 명품 '한미동맹‘은 G20의 대한민국을 이뤄낸 안보 울타리였고, G2로 급상승하는 중국의 권토중래 국면에서 재연될 한반도 4강대결의 제어장치로서 우리는 이를 더욱 굳건히 지켜가야 할 것이다. 이 한미동맹 역시 청년시절부터 한민족국가의 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담보하는 ‘완충지 대한민국’을 주창했던 이승만의 꿈이 실현된 작품이다 (프린스턴대 박사논문). 군사주권 운운하며 전작권 전환에 매달린 정략꾼들을 보면서 이승만은 얼마나 탄식할 것인가.
잠 깨면 성경을 낭독하고 잠들 때 기도하며 ‘자유 대한민국’의 안녕을 하늘에 빌었던 이승만. 문맹율 70%의 무지한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미숙한 민주정치 행태에 한탄하면서도 자유주의 이상향이던 미국 모델을 지켜가려고 애태웠던 80세 애국혁명가, 날마다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는 그가 어찌 후계자 걱정인들 떨칠 수 있었을까. “趙모는 애국애족심은 강한데 자기관리가 부족하고, 張모는 자기관리는 잘하는데 애국애족심이 부족하니 어찌하리오.”(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그의 장기집권이 권세와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기의 국가관리를 맡길 인재들을 못 찾아 방황했음을 역사는 이해하리라. 더구나 부정축재를 위한 것도 아니었음은 건국전 지지자들이 마련해준 이화장(梨花莊) 한 채가 증거하고도 남는다.
국부(國父)에의 과잉충성과 ‘인의 장막’속에서 기득권층이 저지른 3.15부정선거로 폭발한 4.19학생의거, 뒤늦게 진상을 보고 받고는 “부정을 왜 해? 내가 떠나야 학생들이 안 다치겠군.” 부상자들을 문병한 뒤 홀홀히 떠나간 이승만. 그것은 차라리 평생의 나라걱정에서 그를 놓아준 인간해방이었던 셈이다.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는 순수하고 열렬한 애국청년들이 있어 대한민국의 장래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장개석에게 보낸 편지)는 고백대로 이승만은 4.19학생운동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높이 평가하고 받아들였다. “국민이 원하면 그만둬야지.” 자기 발로 물러나는 독재자를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있던가.6.25남침전쟁 후 체제수호와 국민통합을 위해 실시했던 반공법, 공산주의자들에 가차 없었던 통치를 독재로만 몰아붙일 것인가. 이승만 때문에 적화통일의 야욕을 접어야했던 패배자 김일성-김정일 세습독재세력의 ‘독재 타도’ 선전선동에 언제까지 눈감을 것인가.
50년전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이승만 동상을 끌어낸 4.19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민주화를 일궈낸 주역이기도 하다. 식민시대에 태어나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해낸 4.19세대야말로 이승만의 자유민주 헌법체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체험한 역사의 당사자들이다.
전후 140여개 신생국중 최단기간에 성공한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을 국가명절로 정하지도 않고 축하하지도 않는 것은 국가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성공이 부끄러운 세계의 조롱꺼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21세기 글로벌 지구촌은 국가경쟁력 시대다. 경제 지표만으로 선진국이라 할 것인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처럼 국가브랜드 파워는 그 나라 역사와 문화, 정신수준의 총합체라야 경쟁력을 인정받는다. 이승만 만큼 경쟁력 있는 브랜드도 없다. 그의 삶 자체가 수백편의 드라마, 웅장한 오페라다. 이승만 정신은 한민족의 역사적 재산이며 세계 약소국가의 독립모델이다. 더구나 전세계에 잘 알려진 전설적 이름 ‘싱맨 리’ 아닌가.
‘이승만 광장’에 동상을 세우고, 건국절 축제도 만들고, 우남로(雩南路)와 건국기념공원도 조성하여 후세들에겐 교육장으로, 세계인들에겐 문화상품으로, 국격을 갖춘 선진 한국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다.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면 우리는 분명 사생아 아니랴.
[출처] 뉴데일리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0/08/12/2010081200078.html
▲ 1960년 4·19 직후 시위대들이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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