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관련 진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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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제 와서 이승만 대통령의 피난을 비난하는 자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속마음에는 6.25 때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있다가 공산군의 포로가 되어 적화통일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1. 북한군의 각종(공중·지상·테러) 위협에서 벗어난 극적인 탈출이었다.
6·25전쟁 당시 수도(首都) 서울은 당시 남북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38도선으로부터 불과 45km(38도선-동두천-의정부-서울)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 거리는 시속 55km로 달리는 북한군의 소련제 T-34전차가 1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또 30-40km로 달리는 북한군의 작전용 차로도 2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특히 시속 400km가 넘는 북한군 전투기는 몇 분이면 서울에 접근할 수 있었다. 반면 6·25전쟁 때 북한의 수도 역할을 했던 평양은 38도선으로부터 140km나 떨어져 있었다. 그 정도로 서울은 전략적 환경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남침을 당했다.
세계 전쟁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수도가 국경선에서 불과 45km 떨어져 있는 경우는 6·25전쟁 때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밖에 없었다. 최소한 수도는 국경선으로부터 수백km 밖에 위치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320km나 떨어져 있었고,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도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1,100km나 떨어져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도쿄(東京)는 미국의 B-26전략폭격기 공격기지인 사이판(Saipan)이나 괌(Guam)으로부터 무려 1,600km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일본과의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자국의 수도를 전선에서 항상 300-400km이상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이는 국가원수가 포함된 전쟁지도부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시 서울은 전략적 위치상 최악의 수도였다.
소련과 북한은 남침공격계획을 수립할 때, 수도 서울의 전략적 취약점을 간파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개시 2일 차에 서울을 점령하고, 38도선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350km를 미군이 개입하기 이전인 1개월 내에 공산화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2001, 135-137쪽; 러시아 국방부, 김종국 역, 『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육군교육사령부, 2002, 31쪽. 그들은 수도 서울이 38도선으로부터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것에 착안을 하고 그런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소련은 북한에 전차 242대와 전투기를 포함해 각종 항공기 226대를 제공했고, 중국은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한인병사(韓人兵士) 5-6만 명을 북한군에 그대로 편입시켰다.
특히 스탈린(Joseph V. Stalin)과 김일성이 남침 모의과정에서 ‘전쟁승리’를 확신했던 것은 남한 내에 있는 20만 명에 달하는 남로당원(南勞黨員)이었다. 북한지도부는 이들 남로당원이 서울에만 6만 명이 있다고 호언했다. 따라서 북한은 그들이 38도선만 침범하면 ‘이들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할 것으로 믿었다.(토르쿠노프 저, 구종서 역, 『김일성-스탈린-모택동 기밀문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에디터, 2003, 114쪽.) 스탈린은 김일성의 이 말을 믿고 북한의 남침을 승인했다.
또한 서울 시내에는 경무대(景武臺)와 가까이 위치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몇 개의 형무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수 천 명에 달하는 좌익분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에 7,000여명, 마포형무소에 3,500명, 영등포형무소에 1,300여명의 죄수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강선방어와 초기지연작전』3, 군사편찬연구소, 2006, 26쪽.) 만약 이들이 탈출하여 인왕산(仁王山)을 넘어 경무대로 들이닥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경무대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잠재적 위해세력’이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철문을 부시고 좌익죄수들을 풀어줬다.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조선전사 25: 현대편 조국해방전사』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25쪽.)
풀려난 죄수들은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해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참사관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자,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리고, 무장한 죄수들이 보복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은 가택수색을 하면서 정부관리, 경찰관, 기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들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보통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The Charge in Korea(Drumright) to the Secretary of State, FRUS, 1950. Vol.7, Korea, 1976, p.248.) 이처럼 형무소를 뛰쳐나온들 좌익사범의 죄수들은 우익인사들을 개인적으로 처단하거나, 북한군에게 밀고하여 처형시켰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김태선(金泰善) 서울시경국장이 6월 27일 새벽에 대통령께, “서대문형무소에는 수천 명의 공산당 놈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인왕산을 넘어 제일먼저 여기로 옵니다. 각하께서 일시 피난해서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장관과는 다릅니다. 잘못되면 나라가 망합니다.”라며 대통령의 신변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피란을 강력히 권유했다.(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1, 1972, 126쪽.) 이승만 대통령이 이 말을 듣고, 피란을 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렇듯 북한은 ‘전쟁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상태에서 남침을 감행했다. 서울의 북쪽 관문인 개성과 동두천이 전쟁 당일 함락되고, 전쟁 다음날에는 서울에서 불과 18km에 위치한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되고, 적이 창동으로 진출하면서 수도 서울이 적의 야포 사정거리 내에 들어가게 됐다. 특히 북한전투기는 전쟁 당일부터 서울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며, 서울의 주요 시설들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중앙청과 경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합동참모본부,『한국전사』, 합동참모본부 군사연구실, 1984, 787쪽; 공군본부, 『6·25전쟁 항공전사』, 공군본부, 2002, 14-15쪽.)
그 때마다 대통령은 적의 공습을 피해 경무대의 방공호로 피신해야 했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적의 공중, 지상, 그리고 서울시내의 남로당 및 불순세력으로부터 언제든지 위해를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전쟁지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의정부의 함락은 대통령의 안전이 더욱 더 위험해 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최소한 의정부가 함락된 6월 26일 오후에 서울을 벗어나 후방의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도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에 각료들과 측근들이 상황의 급박함에 따른 ‘강력한 권유(적 전차 시내출현·서대문형무소의 좌익죄수 탈옥·지속적인 전쟁지도 등)’에 못 이겨 겨우 경무대를 떠났다. 이는 북한군의 각종위협으로부터 극적인 위기 탈출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경무대의 체류 72시간은 바로 대통령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가의 운명을 건 모험적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은 이 72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구할 구국적(救國的)인 일을 한 숨도 안 자고 처리했다.
2. 남침 이후 대통령의 안전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세계전사를 보면, 전시 국가원수는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 시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처칠(Winston S. Churchill) 영국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일본의 히로히토(裕仁)는 전선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나 방호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도 6·25전쟁 때 신변이 보장된 안전한 장소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남침 직후, 대한민국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안전대책은 거의 ‘방치상태’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경무대는 전시임에도 달랑 카빈 소총을 든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수도서울에 대한 군의 방호대책도 거의 무방비였다. 전쟁 당시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제3연대·제8연대·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장갑대대·기병대대·도보대대)가 있었으나, 남침 이후 이들 부대는 모두 위급한 전선지역으로 출동했다. 제3연대는 포천축선으로, 제18연대는 의정부 축선으로, 제8연대는 가평으로 출동했고, 독립기갑연대도 문산 축선과 의정부 축선 그리고 김포축선으로 각각 분산되어 출동했다. 따라서 전쟁 이튿날인 6월 26일에는 서울에는 수도를 방어할 전투부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서울시경찰국의 기동경찰대대도 전쟁 당일인 6월 25일 오후에 내촌으로 출동함으로써 서울의 전시치안을 담당할 경찰병력마저도 서울에 남아 있지 않게 됐다. 그야말로 6월 25일 오후부터는 서울을 방어할만한 부대나 병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전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침 이후 전쟁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던 경무대도 전시에 대한 별다른 방호대책을 강구하고 있지 않았다. 경무대는 대통령 내외가 기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었다. 그런데도 경무대의 경비는 평시나 다름없었다. 경무대의 경비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400명으로 이루어진 경무대경찰서가 담당하고 있었고, 대통령의 근접경호는 30명으로 이루어진 경무대경찰서의 경호계(警護係)가 담당하고 있었다. (임석빈, 「역사의 현장: ‘경무대’ 그 후광 속에 얼룩진 권력비화」, 『시사뉴스피플』, 11월호.) ) 남침 이후 경무대에 대한 군의 전력보강은 6월 25일 오후부터 6월 26일 오전까지 장갑차 2대가 약 10시간 정도 겨우 지원됐을 뿐이다. 북한군의 남침 이후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참모장은 독립기갑연대와 김점곤(金點坤) 중령에게 지시하여 경무대에 장갑차를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독립기갑연대는 전쟁당일인 6월 25일 오후에 장갑차 2대를 경무대로 보냈고, 김점곤 중령은 장갑차를 경무대 주변에 배치했다. (육군본부,『6·25전쟁 참전자 증언록』Ⅱ, 2004,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488-490쪽; 한남전우회 편,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육군독립기갑연대사』, 도서출판 한컴, 1997, 93쪽.)
그러나 이들 장갑차는 다음날인 6월 26일 오전에 육군본부 지시로, 김포지구가 위험해지자 그곳으로 전환 배치됨으로써 경무대는 다시 무방비상태가 됐다. 이후 전쟁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던 경무대에는 이렇다 할 추가적인 장비나 무기 그리고 병력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은 안전으로부터 ‘철저히 방치된 상태’에서 6월 27일 새벽에야 경무대를 벗어나게 됐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이 평양이 함락되기 3일전인 10월 16일 02:00에 무장경호부대의 호위를 받고 평양에서 도망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김일성은 그보다 10일 전에 아들 김정일(金正日)을 만주의 장춘(長春)으로 피신시키기까지 했다. (정일권, 『정일권회고록: 전쟁과 휴전』, 동아일보사, 1986, 188-189쪽)
3.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군과 경찰병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이후 경무대에 대한 경비나 자신의 경호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는 평상시 하던 대로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대통령은 전시 국정을 수행하느라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전시 국정(國政)에만 전념했다. 경무대의 경비가 전시임에도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채병덕 육군총장이 장갑차 2대를 배치했으나, 전선 상황이 악화되자 김포지구로 전환됐다. (국방부, 『한국전쟁사: 북괴의 남침과 서전기』제1권(개정판), 전사편찬위원회, 1997, 665쪽, 669쪽.)
만약 대통령이 경무대의 경비를 강화하려고 지시하거나, 자신의 신변을 위해 병력을 추가로 증원하라고 지시했을 법도 한데, 대통령은 일체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전쟁 상황을 수습할 대비책 마련에 진력했을 뿐이다. 군 수뇌부도 대통령의 그런 뜻을 알고, 오로지 군사작전에만 매진했다. 대통령은 순수한 군사 작전에 대해서는 철저히 군에 일임하고,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경무대를 떠날 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무장한 군이나 경찰로부터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무대의 비서 및 경호원 몇 명만 대동하고 북한군이 겹겹이 쳐놓은 마수(魔手)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평시에도 주요 행사시 장갑차의 호위를 받았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차가 대통령 및 귀빈의 경호, 행사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들면 1949년 10월 28일 대통령 행사에 장갑차 2대가 출동했고, 그 해 11월 10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의 경호차 장갑차 3대가 출동했고, 12월 3일에는 한국을 방문한 미 의원을 경호하기 위해 장갑차 2대가 김포공항으로 출동했다. (한남전우회 편,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육군독립기갑연대사』, 68-69쪽.)
안전이 더욱 절실한 전시에는 그런 경호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전시 이승만(李承晩)만 할 수 있는 담대(膽大)한 행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공중공습이나 지상화력으로부터 위해(危害)를 입을 수 있는 상황, 적의 전차에 의한 포위망으로부터 포로가 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서울시내 남로당원이나 불순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위한 추가적인 병력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는 지도자로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전시에 대통령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줬던 국가지도자였다.
4. 북한군의 작전미숙이 이승만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했다.
북한군은 전쟁개시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함과 동시에 한강교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이를 위해 남침 당시 수도권에 그들 전력의 2/3이상을 투입했다. 여기에 북한군은 1개 밖에 없는 1개 전차여단과 1개 모터싸이클(motorcycle) 연대까지 투입시켰다. 여기서 전차여단은 한강교 점령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1, 2001, 138쪽)
또한 지상전(地上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포만 하더라도, 북한군은 그들의 군단포병과 사단포병을 합쳐 무려 400여문에 달하는 대포를 의정부-포천 축선에 투입해 그들의 보병부대를 화력지원(火力支援)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군의 전쟁개시 2일차 서울점령은 전혀 무리한 계획이 아니라, 충분히 달성 가능한 계획이었다. 남침 이후, 북한군 주력이 지향된 의정부-포천 축선은 국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그들의 남침계획보다 다소 지연이 됐지만, 그래도 전쟁개시 다음날인 6월 26일 정오경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점령했다. 의정부에서 서울은 지척(咫尺)이었다. 의정부는 서울에서 불과 1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시속 55km로 달리는 북한군 전차로 30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것은 이 보다 이틀이나 늦은 6월 28일 새벽이었다. 계획보다 이틀이나 차질이 생겼다. 그때 북한군이 정상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더라면, 6월 26일 야간에 서울에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전력과 시간적 여유가 그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왜 북한군은 6월 26일 정오경에 의정부를 함락하고도, 그날 저녁에 서울로 들어오지 못했고, 전차는 왜 한강교를 점령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현대전에서 대부대 작전경험이 없는 북한군 수뇌부의 작전 미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북한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중국과 소련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독소전에 참가했던 위관급(尉官級) 장교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소련 군사고문단의 유능한 대령급 고급장교들이 작성해 준 남침계획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스탈린은 남침이후 소련 군사고문단들에게 엄명을 내려 38도선을 절대 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만약 포로가 발생할 경우 소련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의구심을 미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받지 않기 위해서다. 그 결과 의정부 함락 후, 서울로 진입할 부대들에 대한 교통통제를 하지 못함으로써 북한군 제4사단과 제3사단 그리고 전차여단 예하의 병력과 차량들이 서울로 향하는 좁은 2차선 도로로 몰리면서 서로 뒤엉키게 됐다.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됐다. 또한 북한군 전차는 서울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한강교를 점령하도록 계획됐으나, 서울 진입과정에서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군 전차들은 중앙청을 비롯한 한국정부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을 점거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방치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북한군은 남침 직후 국가원수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계획하지 않았다. 남침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찌감치 피란을 갈 것으로 판단해서인지는 몰라도, 북한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시도조차 않았다. 북한군 전차의 성능이라면 충분히 이런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그런 계획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북한군의 또 하나의 작전상의 실수임에 틀림없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에 가까이 진격할 무렵인 1950년 10월 16일에 김일성 생포작전을 긴급히 계획하고, 평양탈환 다음날인 10월 20일 평양 북쪽의 숙천-순천지역에 공정작전(空挺作戰)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때는 김일성이 이미 평양을 빠져 나간 뒤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일성 생포작전은 작전국장인 강문봉 장군의 머리에서 나왔다. 정일권 육군총장은 강문봉 장군의 김일성 생포작전을 받아들여 미군과 협의한 뒤 실행에 옮기게 됐다. (정일권, 『정일권회고록: 전쟁과 휴전』, 185-187쪽.) 비록 김일성 생포에는 실패했지만 우리 군의 지휘관과 참모들은 그 만큼 작전에 유연했고, 융통성이 있었다. 하지만 남침 직후 북한은 달랐다. 만약 북한이 남침직후 성능이 우수한 소련제 전차를 앞세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전개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되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별다른 경비대책이 없었던 경무대의 상황으로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또한 북한군의 작전상 ‘실수’였다.
또한 북한군 수뇌부는 전차운용에 서툴렀다. 전차 자체의 충격력과 돌파력 그리고 속도감을 살리지 못했다. 보병과 전차의 협동훈련이 잘 되지 않음에 따라 전차를 보병의 보조무기로 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구데리안 장군이나 롬멜 장군처럼 전차군단 및 사단을 지휘하여 적진 깊숙이 돌진하는 작전을 한 번도 구사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이 초기에 급격히 무너진 것도 결국 독일군 전차의 신속한 기동력 때문이었다. . 결국 북한군 수뇌부의 이런 작전미숙과 판단착오로 인해 그들은 최초 계획했던 전쟁개시 2일차의 서울점령보다 이틀이나 늦은 6월 28일에야 서울을 점령하게 됐고, 한강교 점령도 그들의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한 채, 국군으로 하여금 한강교를 폭파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고, 특히 북한군에게 대통령이 적에게 생포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전시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최악의 사태를 모면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전시 대한민국에게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5. 대통령과 정부도 전시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는 것이 서울 시민을 버리고 혼자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내용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울은 38도선으로부터 불과 4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북한군은 그것을 노리고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겠다는 계획 하에 전쟁을 일으켰다. 따라서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서울 시민을 피란시킬 상황도 못 됐고,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 있는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은 북한이 계획한 대로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침이후, 북한군은 전쟁 당일부터 김포에서, 개성에서, 동두천에서, 포천에서, 춘천에서 수도 서울을 압박하거나 포위하기 위해 그들 전력의 2/3 이상을 수도권에 집중시켰다. 38도선을 넘는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에 전차 1개 여단 그리고 1개 모터싸이클 연대였다. 이들 전력 가운데 북한군은 무려 5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1개 모터싸이클 연대를 수도권 공격에 투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1, 135ᐨ17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전투』2, 군사편찬연구소, 2005, 13쪽. )
이에 비해 국군은 8개 보병사단에 2개 독립연대였다. 38도선에 4개 보병사단과 1개 연대가 배치됐고, 4개 보병사단이 서울 및 후방에 배치됐다. 더욱이 국군은 전차도 전투기도 그리고 포병화력도 북한군에 비해 절대열세였다. 여기서 혹자는 왜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 볼 때, 전력증강은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은 국군을 38도선을 경비할 수 있는 경비대 수준의 방어형 군대로 육성했다. 그러니 공격용 무기인 전차나 전투기는 국군에게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방침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것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수차에 걸차 미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고 전차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났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의 전쟁대비 운운(云云)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결론이 나지 않을 소모적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에 열세한 국군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후방에 있는 모든 부대까지 전선으로 동원해야 했다. 병력수송을 위해 열차가 동원됐다. 이 와중에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서울시민에 대한 피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중공군 개입 후 1·4후퇴 때, 정부는 미군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20여일에 거쳐 서울시민을 피난시킨 적이 있었다. (전상인, 「6·25전쟁의 사회사」, 『한국과 6·25전쟁』, 184, 214쪽;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236쪽.) 그때는 전선도 38도선 부근이었고, 시간도 20여일이나 되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최소한 이 정도의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100만명이 넘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남침 직후 2-3일 만에 서울시민을 피란시킨다는 것은 당시 정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한다고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정부의 여력으로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송수단도 없었고, 피란민이 이용할 도로는 군사용 도로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기에 북한군 전투기는 공중공격을 감행했다. 서울은 격전지로 변하고 있었다. 만약 이때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서울시민의 안전을 위해 매달렸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대통령과 정부의 그런 노력에 서울시민은 안전하게 피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묻지도 않아도 알 수 있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여기서 정부는 서울시민을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이 아니고, 급박하게 전개되는 전쟁 상황에서 당시 정부의 능력을 고려할 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동선(動線)은 전평시를 막론하고 극비(極秘) 중의 극비사항에 해당된다. 전시에 국가원수가 위난을 피하기 위해 피란을 간다고 공개적으로 알린 예(例)는 고금을 통틀어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또 대통령이라고 해서 전시에 모든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이를 가려서 해야 된다. 전평시를 막론하고 국사(國事)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모든 일은 일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에 따라 처리해야 된다. 특히 전시 국가의 중대사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남침 이후 국가원수 및 통수권자로서의 행보는 이러한 이치에 따라 국정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체류 72시간 동안 전쟁 상황의 불확실성과 보장받지 못한 대통령의 안전, 그리고 북한군의 직접적인 다양한 군사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반으로서, 국가원수로서, 통수권자로서 해야 될 일을 실행에 옮겼다. 결과적으로 이 72시간은 대한민국에 있어 ‘구국(救國)을 위한 소중한 시간’으로 작용했다. 비록 서울 함락 후, 북한군 점령 하에서 서울시민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살아 날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서울시민도 살리고, 국군도 온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은, 비록 신(神)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6. 위험을 무릅쓴 이승만의 서울 체류 72시간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신변은 안전하지 못했다. 적의 공습, 불순불자의 테러,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탈옥과 폭동의 가능성, 적 전차의 위협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국가 중대사를 차근차근 처리해 나갔다. 북한의 남침이 전면전인 것을 알고 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자력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국제사회, 즉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국 대사 무초(John J. Muccio)와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전시 대미(對美) 및 대유엔 외교를 펼쳤다. 면담과 전화 그리고 국회의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며 호소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화답하고, 유엔안보리가 움직였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 의지에 대해서는 전쟁당일 무초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대전 천도’를 내세우며, 미국이 한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정부가 천도를 하면, 미국으로부터 원활한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무초 대사의 말에서, 이승만은 확신을 얻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에 임하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국민들의 의지를 한국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 미국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는 한국국민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미국에 피력했다. 그러니 우리 국군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지원해 달라며 당당히 요구했다. 그것은 중대사였기 때문에 외교적 경로에만 맡기지 않고, 직접 국군에 대한 군수지원 책임이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새벽에 직접 전화를 걸어 얻어냈다. 우리 공군에 없는 전투기도 얻어냈다. 그 와중에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에 들러 전황을 살피며,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빨리 지원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고, 미국과 유엔의 더딘 지원을 채근(採根)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대한민국이 수행할 전쟁목표도 수립했다. 그것은 ‘통일’이었다.전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서울이 위험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통일을 생각했다. 그는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이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긴요한 일들만 가려서 했다. 정부의 전시조치도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치안유지, 전쟁범죄, 전시수송, 전시물가, 전시피란민 구호 등에 한해 실시했다. 순수한 군사작전에 대해서는 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 경무대의 경비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군이 고유의 권한을 갖고 전쟁에 임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않아야 될 일을 구분했고, 해야 될 일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수행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을 살리는 데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했던 그의 통치행위는 임진왜란시 선조와는 그 격이 달랐다. 아무런 대책 없이 몽진(蒙塵)했던 선조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한 후 경무대를 떠난 이승만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난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세월호 선장’에 빗대는 협량(狹量)하면서도 천박하기 짝이 없는 역사인식은 국격(國格)을 폄훼(貶毁)시키고, 국민의 역사수준을 저상(沮喪)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마침내 이승만의 서울 체류 72시간이 대한민국을 구하는 계기가 됐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의 향후 전쟁수행에 지침이 될 전쟁에 대한 ‘가이드라인(guide line)’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고, 미국과 유엔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한국정부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휴전회담이고, 이에 대한 이승만의 대응책이 바로 반공포로석방과 이에 따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그는 당초 목표인 통일은 이루지 못했지만, 북한에 맞설 수 있는 안보적 토대를 마련했다.
[출처]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5/09/18/20150918001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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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애국자님의 댓글
찐애국자 작성일
서울 인도교 폭파가 먼저인지? 아니면 부교 설치 완료 후 인도교 폭파인지 시간대 확인이 궁금합니다.
본인 유년 시절 학교 교육에서는 부교가 폭파 직전 설치 되었지만 부교는 군사용으로만 통행이 허용 되어
민간인들이 부교를 이용할 수 없도록 통제 되었다는 식으로 교육을 받았는대,
부교에도 피난민이 상당수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관련 사진이나 당시의 정확한 기록이 있다면 사실 확인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건국전쟁 영화 상영을 계기로 한강 인도교 폭파 시 민간인 수백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한 사실 확인이 중요해 보입니다.